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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ing of the District Office
몽당연필로 쓴 증평의 역사
증평, 기록의 정원
증평의 번영과 독립을 향한 주민들의 노력은
일제강점기 세워진 증평역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증평의 번영과 독립을 향한 주민들의 노력은 일제강점기 세워진 증평역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1923년,
증평역은 처음 청안역이라는 이름으로 개통되었습니다.
하지만 곧 주민들은 증평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역사의 이름이
‘청안역’으로 지어진 것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증평역은 처음 청안역이라는 이름으로 개통되었습니다. 하지만 곧 주민들은 증평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역사의 이름이 ‘청안역’으로 지어진 것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1945년,
드디어 주민의 의견에 따라 청안역은
‘증평역’으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드디어 주민의 의견에 따라 청안역은 ‘증평역’으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1963년,
주민들은 지속적인 증평의 번영을 꿈꾸며
‘증평번영회’를 만들었습니다.
주민들은 지속적인 증평의 번영을 꿈꾸며
‘증평번영회’를 만들었습니다.
1990년,
주민들의 노력은 마침내 ‘증평출장소’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증평읍과 도안면을 합친 충청북도 직할출장소가 정식으로 출범하면서
군개청의 단초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주민들의 노력은 마침내 ‘증평출장소’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증평읍과 도안면을 합친 충청북도 직할출장소가 정식으로 출범하면서 군개청의 단초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부터
주민들이 걱정했던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증평출장소로 행정은 독립했지만
주민자치는 여전히 괴산군에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부터 주민들이 걱정했던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증평출장소로 행정은 독립했지만 주민자치는 여전히 괴산군에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95년 4월 1일,
이에 증평 주민들은 독립을 촉구하기 위해
‘증평시민회’를 결성합니다.
이에 증평 주민들은 독립을 촉구하기 위해
‘증평시민회’를 결성합니다.
1996년,
증평시민회에 약 50명의 젊은이들 모여
‘증평 자치단체 독립 선언’을 선포하였습니다.
하지만 주민자치를 위한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날을 함께 했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다’고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증평시민회에 약 50명의 젊은이들 모여 ‘증평 자치단체 독립 선언’을 선포하였습니다. 하지만 주민자치를 위한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날을 함께 했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다’고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증평, 도안 그 작은 곳을
자치단체로 만들어주는 것은
국가 예산의 큰 낭비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증평, 도안 그 작은 곳을
자치단체로 만들어주는 것은
국가 예산의 큰 낭비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증평을 기초자치단체로 만들기 위한 공감대가
단결의 힘으로 발전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을 ‘잘 살게’ 만들려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증평 주민들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합니다.
증평을 기초자치단체로 만들기 위한 공감대가 단결의 힘으로 발전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을 ‘잘 살게’ 만들려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증평 주민들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합니다.
증평을 기초자치단체로 만들기 위해 국회로 찾아갔습니다.
여러 번의 설득 끝에 맞이한 마지막 기회,
당시 ‘자치단체 설립추진위원회’의 사무국장이었던
이종일 씨는 이렇게 열변을 토했습니다.
증평을 기초자치단체로 만들기 위해 국회로 찾아갔습니다. 여러 번의 설득 끝에 맞이한 마지막 기회, 당시 ‘자치단체 설립추진위원회’의 사무국장이었던 이종일 씨는 이렇게 열변을 토했습니다.
“다른 모든 곳에서는 자치단체장을 직접 주민이 뽑는데,
우리는 증평군의회도 없고 출장소장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증평은 ‘지방자치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전국이 다 지방자치를 하는데 증평만 소외되었기 때문입니다.”
“ 다른 모든 곳에서는 자치단체장을 직접 주민이 뽑는데, 우리는 증평군의회도 없고 출장소장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증평은 ‘지방자치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전국이 다 지방자치를 하는데 증평만 소외되었기 때문입니다. ”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흐른 후
국회 전문위원이 답했습니다.
‘그래요, 좋습니다. 도와 드리겠습니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흐른 후 국회 전문위원이 답했습니다.
‘그래요, 좋습니다.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때는 정말 하늘을 날 것 같이 기뻤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냐 물으니 전문위원이
‘제가 불러드릴 테니까 받아 적어 보세요’라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정말 하늘을 날 것 같이 기뻤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냐 물으니 전문위원이 ‘제가 불러드릴 테니까 받아 적어 보세요’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옆에 있던 작은 ‘몽당연필’을 가지고
꼭 요만한 메모지 위에 『증평군설치에관한법률안』을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었습니다.
그때 받아 적은 메모를 의안과에 제출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옆에 있던
작은 ‘몽당연필’을 가지고
꼭 요만한 메모지 위에
『증평군설치에관한법률안』을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었습니다.
그때 받아 적은 메모를
의안과에 제출하라고 하더라고요”
“ 상임전문위원실에서 의안과까지
약 300~400미터 정도 되는데,
그 거리를 단 몇 초 만에 간 것 같습니다.
혹시 이창희 위원의 마음이 변하기라도 할까 싶어
몇 초 만에 그걸 들고 뛰어갔던 거죠.

온 주민이 열정을 가지고 자치단체 설립에 나선 건,
이건 정말 대한민국 역사상 없을 거예요 ”
“상임전문위원실에서 의안과까지 약 300~400미터 정도 되는데, 그 거리를 단 몇 초 만에 간 것 같습니다. 혹시 이창희 위원의 마음이 변하기라도 할까 싶어 몇 초 만에 그걸 들고 뛰어갔던 거죠. 온 주민이 열정을 가지고 자치단체 설립에 나선 건, 이건 정말 대한민국 역사상 없을 거예요”
독립을 위해 달려 온 머나 먼 길에는 ‘증평주민’이 함께 있었습니다.
주민자치의 꿈을 향한 증평 주민들의 열정이
증평군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커다란 에너지가 되었습니다.
독립을 위해 달려 온 머나 먼 길에는 ‘증평주민’이 함께 있었습니다. 주민자치의 꿈을 향한 증평 주민들의 열정이 증평군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커다란 에너지가 되었습니다.
2003년 8월 30일,
마침내 증평은 ‘증평군’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증평은 ‘증평군’이 되었습니다.
군민들의 자주적 열정이 깃든 이곳 증평은
대한민국 최초로 주민들 스스로 군을 만들고
자치단체를 이룬 공동체입니다.
군민들의 자주적 열정이 깃든
이곳 증평은 대한민국 최초로
주민들 스스로 군을 만들고
자치단체를 이룬 공동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