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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YKNOLL
사랑의 집, 증평수녀의원
증평, 기록의 정원
1956년 겨울, 부산의 기차역
수녀님 세 명이 양손 가득 짐을 들고
증평행 기차에 올랐습니다.
그분들의 손에 들린 것은 점심 식사를 위한 도시락
그리고 병원 개원에 필요한 의약품이었습니다.
지나는 역마다 교인들과 신부님들의 환영을 받았던 세 여성,
Mary Augusta Hock, Marie Angelica Corazon, Joan Celine은
메리놀전교회의 수녀님입니다.
빨간 벽돌로 지은 증평수녀원에 도착한 세 수녀님은
새로 건축 중인 병원을 바라보며 앞으로의 일들을 다짐했습니다.

병원 건물이 지어지는 동안
수녀님들은 옆 건물에서 먼저 진료를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매일 8시간씩 환자들을 돌보면서도
증평과 근교 사람들을 위한 치료 프로그램을 계획하였습니다.
1957년 2월,
드디어 ‘천주교메리놀병원’은 개원하였습니다.
장날이 오면 병원 앞에는 기다란 대기 줄이 생겼습니다.
5월부터는 거리가 멀어 병원에 방문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자동차를 몰아 여러 지역도 방문하였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주저없이 천주교메리놀병원을 찾아 왔습니다.
1958년 33,657명
1959년 34,881명
1960년 36,078명
수녀회는 예방접종과 건강교육의 중요성을 홍보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예방의학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여기저기 알리는 동안,
1963년 42명의 아이들이 예방접종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1965년 겨울,
천주교 메리놀병원은 증축을 하면서 확장해 나갔습니다.
병원 맞은편에 공중보건실과 환자 대기실을 세웠고,
본래의 병원 건물에는 사무실 공간도 별도로 마련하였습니다.
음식과 의약품에 대한 세금이 면제되고
수만 달러에 해당하는 식료품과 의약품을 기부 받으면서
메리놀병원은 더 많은 환자들을 진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65년,
병원을 찾는 환자는 46,174명으로 꾸준히 늘었습니다.
이 중 신규환자는 12,784명,
보건교육을 받은 이는 12,356명이었습니다.
1966년부터 메리놀병원은 지방정부와 협력하였습니다.
학생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약사보조 교육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 쏟아졌습니다.

천주교메리놀병원은 직접 집을 마련해 환자들을 보호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랑의 집’은 장기 치료를 받거나 숙박할 곳이 필요한 환자들의
따뜻한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천주교 성당에 병원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변변한 병원이 없었어.
거기만 신식 병원이었지. 우리 식구도 몸이 아플 때 거기에 갔고.
우리 어머니도 리어카에 모시고 가봤고. 진료를 아주 잘 봤어, 그 때”
(증평 토박이 이강식 구술 中)
1975년,
천주교 메리놀병원의 책임수녀이자 의사인 Rose Guercio은
가정 대상 의료보험조합을 시행하였습니다.

의료보험조합은 처음에 170 가족이, 3년 만에 2,600 가구가 가입하였습니다.
메리놀병원에서 의료비의 1/3을 부담하여
적자없이 운영된 것은 전국에서 증평이 유일했습니다.

1989년 전국민 의료보험제도가 시행되기 전까지
9,615 가구가 가입하고 꾸준히 운영되었습니다.
1976년에 접어들며 ‘천주교메리놀병원’은
‘증평수녀의원’으로 이름을 변경하게 됩니다.

새로운 병원에서는 수녀회가 주도적으로 행정, 재정, 정책을 관할하였고,
의료혜택에서 소외된 이들을 우선 진료하는 계획을 도입하였습니다.
그리고 1981년,
외진 곳에서 가난하게 살아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우선진료계획이 수립됩니다.
1990년,
35년 간의 노력을 마치고 증평수녀의원은 폐업을 결정합니다.
이미 증평의 공중보건 상태는 개선되었고
우리 정부와 병원이 주민의 건강을 책임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증평수녀의원은 문을 닫기 전까지
증평 시민들에게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증평의 첫 번째 근대식 병원
공중보건의 토대
많은 생의 집결지
증평기록관은 ‘증평메리놀병원’과
‘증평수녀의원’의 고마움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